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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는
왜 나가는가? 혹은 말한다 : 예배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대형화되고, 고도로 조직되고, 물량적인 교회에 익숙한 신도들일 수록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일이면 밀물처럼 버스를 타고 교회로 몰려 든다.

이들에게 예배드리는 1시간은 은혜받는 통로와도 같다. 예배가 끝나면 이들은 썰물처럼 버스를 타고 교회를 빠져 나간다.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열심을 다한다. 반면에 눈에 보이는 신도들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다.

예배 말미에 새교우를 소개할 때, 덩달아 박수를 치면 그만이다. 주기도송을 부르기 전에, 목사님의 권유에 따라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며 악수를 나누면 그만이다. 교역자들도 매주일마다 교회당 안에 몰려 든 인원을 파악하느라 분주하다.

2. 친교는, 주보에도 나와 있듯이, 예배순서 중의 아주 짧은 한 프로그램에 지나지않는다. 때로는 야외예배라든가, 구역별 찬송경연대회 등으로 친교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형태가 어찌됐건 간에, 친교는 교회의 한 프로그램으로 혹은 특별한 행사로 전락하고 만 느낌이다. 오늘날의 교회의 실상을 '친교는 없고 예배만 있는 교회'라 하여 과히 틀릴 것인가?

친교의 상실은 현대 교회가 갖고 있는 빈곤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다. 예배시간이 끝나고 교회문을 나설 때마다, 공허함을 느끼는 신도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매주일마다 "왜 교회를 나가야만 되는 것인가?" 하고 심각하게 묻는 교인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 모든 현상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간다는 기존의 전통적인 답변이 문제가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3. 교회는 왜 나가는가? 실상을 말하자면, 교회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나가는 것이다. 우리와 더불어 함께 예배를 드리는, 눈에 보이는 형제 자매들을 만나기 위해서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친교야말로 교회의 으뜸이다. 본디 교회란 친교를 으뜸으로 하는 공동체인 까닭이다. 친교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매주일마다 그렇게 빠짐 없이 교회를 출석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예배드리기 위해서라고?  예배는 집에서도 가능하다. 가정예배도 있지 않은가?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예배를 대신하기도 한다. 은혜받기 위해서라고? 혼자 있을 때는 은혜를 못 받는가? 교회 나올 때마다 오히려 보기 싫은 사람들 때문에 은혜가 떨어진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이유들은 적절하지 못하다. 교회에 나와야 할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친교'때문이다. 실은 예배조차도 친교의 한 표현이다. 친교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끼리 만나는 것이다. 만나서 사귀는 것이다. 친하게 교제하는 것이다.

이들이 만나고 교제하는 장소가 교회당이다. 이들이 만나는 형태가 예배다. 예배의 핵심은 "마음을 같이 함"이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마 5:23-24)

예배는 친교의 마당에서 피는 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보에 있는 것처럼, 예배 안에 친교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교 안에 예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4. 교회는 왜 나가는가? 친교하기 위해서다. 친교란 무엇인가? 구원받은 성도들이 만나서 서로 사귀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것만 가지고서는 매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야 하는 까닭을 납득시키기 부족하다.

교회는 친교를 으뜸으로 하는 공동체이기 이전에 하나의 '가족'이다. 영적으로 확대된 가족공동체다. 한 가족이라는 사상에서 친교의 필요 충분 조건을 발견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5)

가족은 안 만날 이유가 없다. 가족 간에 만나야만 되는 이유를 나열한 것은 넌센스다. 같은 피가 흐르는 까닭이다. 성도들의 동맥 안에는 같은 피가 흐른다. 그 피는 '그리스도 로고스 형'이다.

모두가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한 하나님이 계신다.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거듭 태어났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맏형이시다(롬 8:29). 교회는 한 가족이다. 분열을 사탄의 행위라고 정죄할 수 있는 근거도 여기 있다. 사탄은 말하자면 가정파괴범인 것이다.

교회는 한 가족이다. 일주일 동안 떨어져 살다가, 주일이면 같이 모여 한 아버지를 즐거워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즐겁고 아름답다.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회에 출석해야 한다. 친교는 교회에 나와야 하는 유일무이한 이유다. 친교는 한 가족이라는 바탕 위에서 가능해진다. 교회는 영적인 가족공동체다.

5. 그래서 적절히 말하면, 친교는 '한 몸 된 가족 간의 애정을 만끽하는 것'이다. 가족으로서 서로를 느끼는 것, 완전한 가족이 되는 것....!  이것 말고 친교의 이상이 달리 없다. 친교란 한 가족이 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 가족 안에서 식탁교제는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분주해도 식사만큼은 같이 한다. 식탁에서 자연스레 대화가 이루어진다. 식탁은 가정에서의 친교의 본거지다. 한 자리에 모여 앉아 한 솥밥을 먹는 것, 그것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다. 기쁨이나 슬픔이나 가난이나 풍부를 함께 하는 것이다. 한 솥밥을 먹을 때 비로소 '식구'(食口)가 된다.

가족이란 한 솥밥을 먹는 사람 이외 다름 아니다. 이처럼 교회가 영적으로 확대된 가족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식탁교제'를 회복해야 한다. 매주일마다 성도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식탁교제는 이루어져야 한다.

초대교회에서 식탁교제는 매우 중요했다(참조. 갈 2:12). 그런데 여러 세기를 거쳐 오면서 애찬의 정신은 사라지고 그것은 성스러운 의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식탁교제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는 '밥상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도 먹을 것이 펼쳐지는 잔치마당을 즐겨 찾으셨다. 식탁에서 죄인과 병든자와 함께 나누는 주님의 교제는 끊임 없이 펼쳐졌다(참조. 막 2:15~16). 주님에게 식사를 같이 하는 잔치마당은 천국의 모형이었다.

교회는 매주일마다 식탁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식탁에서 '평균'의 이상이 가장 완벽하게 실현된다. 어떤 이는 고기를 먹고, 어떤 이는 죽을 먹을 수는 없다. 그것은 거짓된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그래서 실패했다(고전 11:17-22).

6. 교회는 영적으로 확대된 가족 공동체다. 가족이라는 날틀 위에서 친교는 수놓아진다. 식탁교제는 그 핵심이다. 식사를 같이함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요, 모든 것을 더불어 나누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평균의 원리는 모든 것에까지 미친다. 가족끼리는 모든 것을 공유한다. 여기에는 '능력에 따라 걷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평균의 정신이 살아 숨쉰다(행 2:42-47). 헌금은 이러한 정신 위에서 실시되어야 한다.

헌금은 '서로 나누는 것'이다. 서로 '통용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조차 서로 같아지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이 적을 수록 좋다.

헌금의 정신은 "넉넉한 것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고후 8:14)이다. 그것은 성도들 간에 "평균케 하려는 것"(고후 8:13)이다. 교회 안에서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여야" 한다(고후 8:15).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이 심화된 교회는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약 2:1-13).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초대교회의 모습은 이제까지 말해 온 가족공동체의 원형이다. 거기에는 교제가 있었다. 그들은 "떡을 떼었다".(행 2:42, 46).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행 2:44-45)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할 수가"(행 2:46 상) 있었고, 그 결과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행 2:46 중)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친교의 소문이 널리 알려지자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다"(행 2:47).

7. 교회의 으뜸은 친교다. 이 친교를 근간으로 하여 교회는 봉사해야 한다. 교회의 친교는 자기소모적인 것일 수가 없다. 그것은 창조적, 생산적이어야 한다. 

친교와 봉사는 바늘과 실이다. 친교와 봉사는 교회의 양 면이다. 친교가 교회의 내적 원리라면 봉사는 교회의 외적 원리다.

교회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교회는 '성전'이 아니라 예배당, 즉 예배드리는 장소일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성도는 이제 교회를 통해서 세상으로 나아간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전진기지다. 성도는 교회에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관계를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봉사'다. 봉사는 적절히 말하면 '고난받는 이웃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봉사와 구제와 선행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세상에 널리 전시한다. 교회는 봉사와 구제와 선행으로써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친교의 미덕을 세상에 널리 증거한다.  말하자면 봉사는 '친교의 드러냄이며 증거'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친교는 '사랑의 교회 내적 실현'이다. 봉사는 '사랑의 교회 외적 실현'이다. 먼저 안에서 실현되고 나서 밖에서 실현된다.

현대교회가 봉사에 실패한 것은 교회 안에서의 친교의 실패를 반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이가 남도 사랑할 줄 안다는 말이 여기에 적용된다.

친교는 '교회의 자기사랑'이요, 봉사는 '교회의 이웃사랑'이다.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이 한데 모여 하나님 사랑을 이룬다. 역으로 하나님사랑은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에서 증명된다. 친교에서 봉사가 열리고, 이것을 통해서 세상은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교회는 노동하는 공동체이다. 주일은 그저 쉬는 날이아니다. 주일은 오히려 선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날이다.

주님께서도 "안식일에 선을 행함에 있어서 열심"이셨다(막 3:4, 눅 13:14-17, 14:1-6).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부여해 주신 각각의 재능으로써 혹은 소유로써 이 필요에 부응한다(참조. 롬 12:6-8).

8. 교회는 왜 나가는가? 친교 때문이다. 친교는 무엇인가? 한 가족임을 느끼는 것이다.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밥상공동체는 그래서 필요하다. 더 나아가 모든 것에 걸쳐서 참다운 평균의 정신이 실현될 때, 가족공동체는 완성되어 진다.

이러한 친교를 근간으로 하여 봉사가 이루어진다. 봉사는 무엇인가? 이웃의 삶에 동참함이요, 이웃을 섬김이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바로 친교와 봉사다. 친교는 '교회의 자기 정체성'이다. 봉사는 '교회의 자기 실현'이다. 

친교와 봉사를 두 축으로 하는 교회는 출석인원수를 체크하고 헌금의 많음을 자랑하고 조직을 능사로 삼는 거대교회일 수가 없을 것이다. 오로지 교회당에서 형제 자매를 만나 한 가족으로서의 따뜻함을 만끽할 수 있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만이 친교와 봉사라는 두 축은 힘차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화한 현대 사회 속에 교회가 존재해야 할 유일무이한 정당성이다. 교회는 친교와 봉사의 공동체인 것이다. (2008.4.26)


>>> http://findingecho.tistory.com/

Posted by 虛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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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닥치고 조낸 찾는거다. 디오게네스마냥 등불 들고서...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근데 뭘 찾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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