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맞추면 기분 더럽고, 틀리면 '썩소'가 절로 튀어나오는 간단한 퀴즈 하나. 종교의 현실참여를 다룬 아래 네 개의 사설을 읽고,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조선일보 목소리인지 알아 맞춰 보시라. 답은 하나일 수도 있고,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레디 액션~!

(1)"종교에 있어 이승의 현실은 일시적인 뜬구름일 뿐, 본질적인 존재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는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종교는 오히려 현실을 열심히, 진지하게, 값지게 살 것을 권유한다. 종교가 중요한 시기마다 정치적인 현실에 대해 예언자적으로 발언하고 신도들에 대해 행동의 준칙을 제시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종교의 이같은 「현실참여」는 흔히 빛과 소금의 역할에 비유되곤 한다..."

(2)"시국선언이 잇따른다는 것은 그 사회의 운행에 빨간 불이 켜졌다는 뜻이다...예장(통합)의 성명은 여론을 무시한 정부의 폭주가 도를 넘어선 데 대한 우려가 종교계에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종교인들의 목소리는 결국 교인의 목소리이고 나아가 국민의 목소리다. 교회와 사찰과 성당에서 오가는 이 같은 목소리가 정부에만 들리지 않는다면 국가의 장래는 깜깜하고 국민의 고통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3)"종교인이 복잡한 정치·외교·경제·사회 문제들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다 발을 헛짚게 되면 종교의 권위는 어찌 되겠는가. 종교도 정치에 발언할 수 있고 때로는 해야 할 때도 있다. 지금 종교와 종교인은 대통령과 정당에는 헌법이 정해준 저마다의 구실을 제대로 해내라고, 국민에겐 감정의 열기를 내리고 국민의 건강을 지키면서도 이 위기가 헌정의 위기로 번져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이성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종교는 종교의 위치에서 발언할 때 더 큰 의미와 무게를 지니는 법이다..."

(4)"국민이 힘들어 하는 시대다. 사람 사이 관계도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다. 모두가 힘들고 각박한 시대에 국민이 종교인에게서 가두투쟁을 이끄는 전사의 모습을 찾겠는가. 이런 시대일수록 종교인은 국민 마음과 이 사회 안에 평화를 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야 한다. 국민이 지금 종교인에게서 듣고 싶어하는 말은 누구를 몰아내고 타도하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이 어려운 시대를 타고 넘어가자는 말일 것이다..."
 
곁보기엔 어려워 보이지만 그러나 눈치 빠른 분들이라면 충분히 맞출 수 있었을 게다. 그렇다. 정답은 (1)(2)(3)(4) 네 개 전부다.

첫번째 글은 1996년 3월 22일에 작성된 <종교계와 4.11총선>이란 사설, 두번째 것은 2004년 9월 17일자 사설 <혼돈의 시대에 다시 울리는 敎界의 목소리>, 세번쨰 글은 2008년 7월 2일자 <종교와 정치>라는 사설, 그리고 마지막 글은 <각박한 시대에 국민이 종교인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라는 2009년 2월 3일자 사설에서 나온 것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종교인의 정치 참여를 옹호한 2004년 9월 17일자 조선일보 사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종교인의 정치 참여를 비판한 2009년 2월 3일자 조선일보 사설

어떤가? 문민정부 시절 종교의 현실참여를 "빛과 소금의 역할"에 비유한 신문이, 그래서 노무현 정부 대에 이르러 국보법 폐지 반대명목으로 한기총 등이 들어 일어났을 때 "종교인들의 목소리는 결국 교인의 목소리이고 나아가 국민의 목소리"라고 떠받든 신문이,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돌연 낯빛을 바꾸면서, "종교는 종교의 위치에서 발언"해야 한다느니 "국민은 지금 종교인에게 누구를 몰아내고 타도하자고 하는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니 하며 횡설수설하는 꼬라지를 목격하신 소감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얼굴이 바꿔지는 변검 묘기를 능가하는 조선일보의 변화무쌍 신묘막측한 복화술 묘기가 이쯤 되면 예술 아닌가. "맞추면 기분 더럽고, 틀리면 '썩소'가 절로 튀어나오는 퀴즈"란 말을 맨 앞에 단 것도 그래서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치고 이런 것을 보고 기분이 잡치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성경에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약 3:11)란 구절이 있다. 한 입으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윤리문제를 넘어 창조 섭리에도 어긋난다는 그런 뜻이다. 사도 야고보가 '샘'의 비유를 들고, 여기에 "어찌"라는 강한 부정의 말까지 삽입한 것도 그 때문일 터다. 그렇다면 한 입(구멍)으로 상반된 말(단 물과 쓴 물)을 내뱉는 조선일보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신문' 내지는 하나님의 창조에 반하는 '반기독교적 신문'이라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더 가관인 것은, 이런 '이부지자(二父之子)' 신문이 스스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외려 '일관성 있는 논조' 때문에 사랑받고 있다는 식으로 독자들을 호리고 있다는 거다.(2000년 3월 5일, 창립 80주년 기사 참조).

조선일보는 심지어 지난 광우병 사태 때 "조선일보가 정권교체 후 극단적인 말바꾸기를 하고 있다는 포털의 댓글에 충격을 받아 과거 조선일보의 사설을 찾아봤더니, 이들의 주장과 달리 조선일보의 논지에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에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는 어느 대학생 독자의 투고를 조선닷컴에 오래 내걸기도 했다(2008.6.27).

논리 일관성을 자랑하면서 '한 입 두 말'의 배반된 행태를 서슴없이 반복하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기는 커녕 말바꾼 적 없다고 외려 큰 소리치는 신문이라면, 자칭 '일등신문' 조선일보의 정신상태가 정녕 이 정도라면, ‘사이코패스 신문‘이 아닌지 한번쯤 심각하게 의심해 볼 만 하지 않을까.(2009.2.5)



- 虛虛 -
--------------------------------------------------------------------------------- ***
#. <데일리서프>에 기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虛虛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장동만 2013.12.15 0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교인의 현실 참여


    “우리는 (세상의 잘못된 것에 대해) ‘No!’ 라고 말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Evangell Gaudium)‘에서

    카톨릭 전주 교구 박 창신 신부의 ‘시국 미사’가 일파만파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정치 사회적으론 종교인의 정치적 발언 내지 행위의 타당성 정당성을 에워싼 논란이 뜨겁고, 학계에선 새삼 정교 분리 (statecraft vs. soulcraft)의 역사를 고찰하는가 하면, 카톨릭 내부에선 교리(서) 해석이 분분하다.

    이 모두가 근본적인 시각이 다르고, 그 문제 접근 방식이 달라 마치 백가쟁명 양상인데, 나로선 이번 사태를 계기로 종교인, 특히 목회자 (신부/목사)의 현실 참여 문제에 대해 평소 생각하던 바를 좀 적어 보고저 한다.

    종교 (신앙) 인으로선 인간 만사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인간 생명의 존립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적인 정치 경제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은 하나님의 뜻대로 정의롭고 공평하고 선(善)하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번 박 신부의 ‘시국 미사’ 파동에 대해 서울 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 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이 임무를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평신도의 소명 으로 (카톨릭 교리서는) 강조하고 있다.”
    “사제들은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 신자들의 고통과 짐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참여 내지 정치 행동이 평신도들에게 소명이라면 사제에게는? 그리고
    사제들이 신자들의 고통과 짐을 함께 질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비교인 (非敎人)에겐 많은 의문을 자아낸다. 어딘가 앞뒤가 안 맞는 논리적인 모순을 느낀다.

    브라질 돔 헬더 까마라 대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빵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내가 가난한 사람들이 왜 빵이 없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한다.
    (When I give food to the poor, they call me a saint.
    When I ask why the poor have no food, they call me a communist.)”
    자비를 베푸는 것은 종교 행위이고, ‘가난의 이유’를 묻는 것은 곧 정치 행위가 된다? 참 아이로닉한 이야기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 강론한다.
    “지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Listen to the voice of the earth)”
    “지상의 목소리”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 아닌가.
    “귀를 기울여라.” 곧 거기에 관심을 갖고 행동라는 말 아닌가.

    보수 전통 종교, 많은 보수 주의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 개인의 (영혼) 구원만을 설교한다. 인간의 하루 하루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정치/경제 문제는 그들이 간여할 바가 아니란다. 그것들은 정치 경제하는 사람들의 몫, 정교는 분리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묻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정치 경제가 잘못 돌아갈 때, 그로 인해 숱한 생명이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 듯’을 이 땅에 펼친다는 그들로서 이를 외면, 오불관언 해도 좋을 것인가.
    그래서는 안될 줄로 안다.

    그들은 누구보다 앞서 하나님 정의의 깃발을 높이 쳐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땅의 불의, 죄악, 불공평, 불선 (不善)을 증언하고 규탄해야 한다. 이는 한갓 정치(적) 발언 / 행위가 아닌, 곧 ‘하나님 말씀’의 대변이자 실천이며 그들의 소명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또 이는 한 생명을 구원하는 소선 (小善)을 뛰어넘어 다수를 함께 구원하는 공동선 (共同善)의 길이기 때문이다.

    <장동만> <12/01/13>

    P.S. 첨부한 글, ‘잉여 청춘이여,
    Think Global!”

    관심 있으신 분, 한 번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입 닥치고 조낸 찾는거다. 디오게네스마냥 등불 들고서...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근데 뭘 찾어~~~?
虛虛

달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