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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시간마다 신도들에게 그렇게 강조하는 온유함은 무엇인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서 가르쳐지고 있는 온유함은 무엇인가?

대개 사람들은 그것을 얼굴의 표정과 연관시켜서 말하기를 좋아한다. 예컨대, 쉽게 분노하지 않는 것, 얼굴에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띠는 것,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까다롭지 않고 무난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 등등. 다시 말해서 비판적이거나 도전적이지 않고 어느 때나 무골호인처럼 수용적인 사람을 가리켜서 온유하다고들 말한다.

2. 그러나 과연 성경이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온유함은 그러한 것일까? 위에서 기껏 강조하고 있는 온유함이란 것은 실은 예수의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오늘날 '교회가 발딛고 있는 계층' 곧 중산층의 사회에서 요구하고 있는 덕목은 아닐까?

대체로 체제에 대하여 보수적이고 혁신적인 변화를 바라지 않는 중산층의 교회는 체제가 바라는 인간을 예수의 덕목이란 이름으로 가르치고 교육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다시 생각컨대, 온유함은 무엇일까? 예수의 온유함은 체제유지에 용이한 그러한 것일까?

혹 정반대의 의미에서 예수의 그것은 - 우리가 바르게 이해한다면 - 체제에 대하여, 당시의 상식에 대하여, 당시의 고정화된 예법과 체계에 대하여 혁명적일만큼 파괴적이고 과격한 것은 아니었을까?

3. 성경에서 발견한 예수의 온유함은 '개방성'과 일치한다. 그것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받아들이는 무차별적인 포용성과 개방성이다. 그것은 계급화되고 폐쇄적인 사회에 반대하는 열린 마음이다.

그것은 특히 당시 사회에서 힘없고 피곤한 계층, 인간으로 인정받기를 거절당했던 빈곤하고 무기력한 계층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그들을 벗으로 받아 들이는 가히 혁명적이고나 할 그런 온유함이다.

이러한 개방성이 파격적이고 혁명적으로 이해되는 것은 그것의 무차별적인 성격 때문이다. 한정된 개방성과 차별적인 개방성은 또다른 의미에서 배타적이고 계층적이다. 어느 사회마다 차별이 있게 마련이고 더욱이 병든 사회일 수록 그 사회는 고질적으로 굳어져 계급화된다.

지배자의 사회가 있는가 하면, 다수의 암하아레츠의 사회가 있다. 자본가들의 사회가 있는가 하면, 다수의 프롤레타리아의 사회가 있다. 계층화가 진척된 사회일 수록 이러한 개방성은 한정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무차별적인 개방성은 위험한 발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4. 예수의 온유함의 정체가 잘 나타난 곳이 마 11:28~30이다. 본문의 핵심은 "다 내게로 오라"는 초청에 있다. 이 초청은 무한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초청이 특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지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어떤 이들은 그것을 교리적으로만 이해하려 든다. 나아가 민중의 구체적인 현실은 도외시하고 영적으로 탈색시켜서 그것은 죄로 인해 지치고 슬픈 우리들이라고 해석하려고만 한다. 그래야 경건에 도움이 된다는 듯이.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당시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된 민중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짐을 지고 싶어서 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배자들과 기득권자들이 강요하는 폭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삶을 멍에처럼 일평생 어깨에 지고 다녀야 했다.

예수가 부르는 자는 우선 이들이다.  예수의 온유함은 이러한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다. 예수의 온유함은  상처입고 헐벗은 사람들을 찾아가 벗으로 삼는 것이다. 이런 개방성과 무차별적인 포용성을 말하지 않고는 예수의 온유함을 말할 수 없다.

5. 그러므로 바르게 이해할진대, 예수의 온유함은 체제유지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체제전복적이다. 그것은 고정화된 상식과 율법과 전통과 관습을 파괴하도록 만든다.

이것을 왜곡시키고 있는 주범은 바로 교회, 곧 중산층의 교회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중산층이 요구하고 있는 인간을 양산하려 하고 있다. 정작 예수의 온유함에 대하여 진지하게 반성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들 교회다.

예수의 온유함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의 벗'(마 11:19)으로 불리운데서부터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럴진대 교회의 온유함도 '교회가 누구의 벗이냐'는 자기반성적인 물음 위에서 숙고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2010.09.19)



- 虛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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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虛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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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19 1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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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닥치고 조낸 찾는거다. 디오게네스마냥 등불 들고서...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근데 뭘 찾어~~~?
虛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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