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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설교하기가 겁난다. 얼굴이 많이 상해서다. 보는 이들마다 얼글이 안 좋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면 속이 상한다. 그러나 한 편 생각하면 감사할 조건도 된다. 왜냐? 예수도 얼굴이 많이 상했으니까(참조. 사 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돌이켜 보면, 내가 예수를 닮은 게 거의 없다. 딱 하나. 얼굴 상한 것밖에 없다. 그러나 얼굴이 상한 이유는 하늘과 땅 차이다. 예수는 죄인들 때문에 사랑으로 얼굴이 상했다지만, 나는 순전히 내 문제 때문에 고민하느라 그런 거다.

나도 예수를 닮고 싶다. 정말이다.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닮고 싶다. 예수를 닮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수가 말했다. "나를 따르려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무슨 말인가? 세상적인 삶의 방식과는 대조되는 길을 가라는 거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말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라는 것이다.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자신의 순정성을 증명하라는 거다.

1. 그러면 '세상의 길'이 무엇인가?

(1)그 전에 먼저 '세상'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살펴 보자. '세상'을 영어로 'world'라고 번역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장소적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헬라어로 '코스모스'(cosmos)이고, 그 본래 뜻은 사회질서를 의미한다. 

헬라사회에서 '코스모스'는 잘 정돈된 질서를 뜻했다. 벧전 3:3에 '단장'이란 말이 나오는데, 여자들이 화장해서 자신을 정돈되게 한다는 의미로 '코스모스'란 말을 갖다 썼다.
 
#. 벧전 3:3 -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성경에서 '코스모스'는 죄악이 지배하는 이 땅의 기본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코스모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신의 지혜(고전 1:20)를 갖고 있다, '코스모스' 안에서는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권력자와 연약한 자의 계급구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세상'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치체계다(참조. 요일 2:15~16).

#. 고전 1:20 -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요일 2:15~16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2)그렇다면 '세상'의 기본적인 특성은 어떠하냐? 한 마디로. 자기를 사랑하고 높이는 것을 좋아한다. 이를 '상향성'(上向性) 혹은 철학적으로 '에로스'(Eros)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남보다 더 높아지고 싶어 한다. 남보다 더 잘 돼서 지배하고 싶어 한다. 남보다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남들에게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최고가 되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특히 오늘과 같은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위로 향하려는 충동'에 휘둘리기 쉽다. 이같은 상향 일변도의 생활양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감히 상상조차 못 한다.

부모와 교사들이 자식들에게 학생들에게 이구동성으로 부르짖는 말이 뭔가? 성공한 인간, 승리자가 되라는 거다. 남보다 뒤쳐지지 말라는 거다. 경쟁에서 뒤쳐진 사회의 낙오자들을 우리는 부끄러워 한다. 우리는 성장과 발전의 신화에 경도된 나머지. 부와 권력의 증대를 약속하는 사람에게 '묻지마 몰표'를 던진다. 국격이 곤두박질치고 공의가 조롱당하는 이 땅의 정치적 비극도 결국 이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종교라고 이같은 상향성의 열망에서 안전한 게 아니다. 상향성 자체를 종교로 삼다 보면, 성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표지, 실패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는 표지가 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우리는 늘 승리하고, 늘 건강하고, 늘 사업에 번창해야 한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순복음식 '3박자 구원'을 생각해 보라.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2. 그러나 예수의 길은 세상의 길과 다르다.

세상의 길은 위로 위로만 올라가는 상향성이지만, 예수의 길은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가는 하향성이다. 전자를 '에로스'라고 한다면, 후자를 '아가페'(Agape)라고 할 수 있을 터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신앙의 중심부에는 하나님쎄서 전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복종시키셨으며, 그로써 우리들에게 자신의 신성을 계시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신비가 있다.

성경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인간을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에덴에서는 당신의 현존으로 인간과 함께 하셨고, 족장시대에는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 오셨으며, 모세 시대에는 광야에서 천막 안에 계시는 분으로 백성을 만나셨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은 예수라는 인격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인간의 역사에 들어오셨다.

이 신비가 너무나 커서 바울은 이렇게 찬미했다. 빌 2:6~8을 다함께 찾아서 읽어 보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은 인간의 몸으로 역사 속에 들어 오셨다.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판인 예수 또한 철저하게 하향성의 길을 걸으셨다.

그는 헤롯의 궁궐이 아니라 비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변두리 나사렛마을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랐다. 커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고, 소박한 어부들이 따랐던 갈릴리의 전도자가 되어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다. 그는 언제나 소외받고 핍박받는 이들의 편에 섰다.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구원자로, 정치적 메시아로 모시려 하자 그는 단연코 거부했다. 제자들 가운데 서로 높아지려는 다툼이 일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다"(마 20:287)고 꾸짖으셨다.

이 모양 예수가 계시하신 복음은 철저하게 하향성의 복음, 상향성 중심의 사회를 동요시키고 전복시키는 복음이다. 그 점에서 예수의 복음은 칼 막스의 이론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더 혁명적이며 더 위협적이다.

다시 말한다. 예수의 길은 상향성이 아니라 하향성의 길이다.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내려가는 길이다. 군림하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길이다. 소유하는 게 아니라 나누는 길이다. 남을 못박는 길이 아니라 내가 못박히는 길이다.

예수가 당신의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갸르쳐 주시고 싶어하는 생활방식이 이러하다. 기독교인이라 칭하는 우리네 삶은 어떤가? 비슷한가? 그 길로 가고 있는가?

3. 반성과 권면

교회당에 예배드리기 위해 앉아 있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자기 사랑' 있는 곳에는 어디나 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기로 서약한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의 모습은 예수를 모르는 이들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슬프게도 나는 교회에서 오히려 세상의 모습을 더 자주 목격한다. 상향성의 욕망이 십자가 아래서 꿈틀대는 호러블한 모습을 수시로 목도한다.

우리는 겸손을 추구한다. 그러면서도 은연 중에 남보다 더 겸손해지기를 바란다. 남보다 더 겸손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칭찬받고 높아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안달한다. 부지런한 사람, 유능한 사람, 희생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얼굴이 햇살처럼 펴지고, 인정받지 못하면 얼굴색이 금세 어두워진다. 그리고 시험에 든다.

우리는 남의 눈에 띄어야 좋은 것이라고 하는 세상의 정신에 너무나 동화돼 있어서, 이름 없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은 어떤 가치도 없는 것처럼 평가절하한다.
 
우리는 늘 주목받고 싶어한다. 예수의 교회에서도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남들과는 구별된, 툭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이런 말을 하는 나부터가, 실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지고야 말겠다는 묘한 욕망 속에 살아 왔다. 이 욕망이 너무 강렬해서 나는 어디서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이 세상의 욕망에 일조하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글을 써도 뭔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글을 쓰고 싶었고, 설교를 해도 다른 목사들과는 구별된 수준높은 강해로 남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고 싶었다. 나는 이 교회 내에서도 어느 정도 예외적인 인물이 되고 싶어 했고, 모든 사람들이 알아주는 실력있는 목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나는 내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조그마한 자리도 마련해 주지 못하고 있는 미련한 목사임을 알게 됐다.

나는 끝없이 남과 달라지고자 했지만 성경은 그때마다 말씀하시길, "너는 독창적으로 할 수 없다. 네가 전하는 말이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고 한다. 기도할 때마다 나는 "보다 더 같아져라. 성인들과 같아지고 예수와 같아져라"는 내적인 음성을 듣는다.  

나는 십자가의 길을 가기를 원한다. 동시에 출세도 하고 싶어 한다. 나는 훌륭한 크리스챤이 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유명한 교사 설교자가 되고 싶어 한다. 나는 성인처럼 살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죄인의 기쁨을 즐기고 싶어 한다. 나는 예수와 가까이 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애정을 받고 싶어 한다. 이렇다 보니 내 사는 것이 피곤하고 힘들다.

키에르케고르(S.A.Kierkegaard)는 "한 가지 것을 바라는 것이 성인의 특성이다"고 말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는 한 가지 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으며, 표리부동 극심한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상향성의 유혹과 시험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조차 자신의 공생애 기간 동안 이러한 시험을 거듭 받으셨다. 그리고 그때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이겨내셨다. 우리도 그러한 싸움을 싸워야 하지 않나?

말씀을 맺는다.

나는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예수의 성품을 이 세상 속에 드러내고 반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여러분 모두가 예수의 하향성의 복음에 온 몸으로 응답하는 성인의 삶을 누리기를 기원한다.(2010.10.24)



- 虛虛 -
Posted by 虛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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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식 2010.12.01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건강□<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내병은 내가고친다.<
    <font color=#ffffff></font>
    <font color=#ffffff>ⓦ</font>정<font color=#ffffff>⒬</font>보<font color=#ffffff></font>


입 닥치고 조낸 찾는거다. 디오게네스마냥 등불 들고서...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근데 뭘 찾어~~~?
虛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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